청순한 펭귄알투디투 2015. 11. 25. 02:25

여기 와서 두 번째 학부 강의를 했다. 내가 분명히 지난달에 처음 수업하고 나서 느낀 절망감과 상실감을 어딘가에 써놨는데, 싸이에도 없고 이글루스에도 없네 어디간거지... 


첫 수업은 M이 부탁해서 간 3학년 수업이었는데, 50평 이상의 광활한 강의실에 학생이 6명 있었다. 내가 여기 와서 쓴 첫 논문 주제에 대해서 애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하는 거였는데, 놀랍게도 6명 중 2명은 내내 휴대폰을 만졌고, 2명은 나를 가끔 쳐다보며 서로 속닥였으며, 나머지 2명만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차라리 내 논문을 발표하라면 1시간정도는 떠들 수 있는데, 이건 학부생 레벨에 맞추어 설명을 하느라 이런 저런 모델 다 떼고 관련 산업 얘기를 하려니 말 할 거리도 부족하고, 게다가 영어로 해야되고, 애들은 중간에 나가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왜 교수들이 학부 수업 강의를 피하려고 하는 지 이해가 됐다. 

아 물론 전적으로 애들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학부 수업에 가서 대학원 레벨의 발표를 했으니, 미리 애들의 눈높이를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이 못해도 절반은 될거다. 이 경험으로 배운 건 학부수업을 할 땐 예를 들어 미시를 가르치더라도 대학원 미시처럼 수식과 논리로 커버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애들이 관심을 가질만 한 사례나 내용으로 최대한 흥미를 유도해야 되는구나 하는거다. 애들은 수업이 듣고 싶어 미치겠어서 강의실에 오는 게 아니다. 

끝나고 나서 M이랑 얘기했는데, M이 말하길 걔들은 그나마 괜찮은 학교의 3학년들인데도 그러니, 하위 티어 학교의 1-2학년들이 수업시간에 어떨지 상상을 해 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강의자가 미리 잘 준비를 해야 된다고, 담엔 더 잘하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E의 수업이었는데, 지난 주 목요일에 시험감독을 들어갔고, 오늘은 시험지 나눠준 뒤에 미시쪽 내용을 강의하는 계획이었다. 근데 이번 주가 Thanksgiving이라서, 게다가 교수도 아니고 대학원생이 대체강의를 한다니 더 그랬겠지만, 시험은 39명 봤는데 오늘 수업엔 14명이 왔다. 지난 트라우마를 애써 잊으려 노력하며 꿋꿋이 진행을 했는데, 하다보니 14명 중 하나가 첫번째 수업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2명 중 하나더라. 내가 준비한 내용 마치고 E가 제안한대로 애들에게 연습문제 그룹으로 풀게 시키고 답을 발표하라고 했는데, 전반적으로 별 무리 없이 끝난 것 같다. 




11월 초부터 좀 슬렁슬렁 했더니만 드디어 여러가지 신호들이 나에게 농떙이는 이제 그만이라고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계속 이래도 되는 거냐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교수들이 슬슬 이제 한 번 봐야되지 않겠냐고 연락이 오고 있다. 사실 11월의 느슨함은 내 스스로 좀 놔버린 탓도 있지만, 절묘하게 나랑 일하는 교수들도 한 달 내내 뭔가 일을 진행을 못시켰다. E는 절반정도 출장중이었고, C는 11월 초에 내게 모델 보낼테니 검토하라고 했지만 아직도 보내주지 않은데다가 중간에 내가 보낸 경과 보고 메일에 답도 안했으며, M은 뒤늦게 알고 보니 11월의 대부분을 다른 지역에서 보냈단다. 뭔가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2년 넘게 달렸으니 좀 쉬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이제 슬슬 그만해야겠다. 오늘 강의 가는 도중에 C를 만났는데, 뭔가 나라잃은 표정까진 아니지만 어쨌든 엄청 오래 까먹고 있던 뭔가가 기억나서 안타깝다는 느낌으로 we should meet 이라고, 담주에 보자고 하고, M 연구실 가서 얘기를 좀 했는데, 담주에 C 만나서 회의 할 때 자기도 불러달란다. 내 3번째 챕터 주제 잡는거 C랑 자기가 지난 주에 얘기해 봤는데, 뭔가 드라이브를 이젠 걸어야 될 것 같다고. 


그러고 보면, 여기 교수들은 엄청 자기들끼리 말을 많이 한다. 내가 뭘 하는지, 내 논문의 진행상황이 어떤지를 한 교수에게만 말하면 1주일 내로 학과 내 모든 교수들이 알고 있다. 교수들이 내 얘기 혹은 학생들 얘기만 하진 않을거고, 그만큼 자기들 연구 얘기도 엄청 하겠지. 이걸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나도 내 사무실에만 앉아있지 말고, 최소한 2주에 한 번 씩은 나한테 돈 주는 교수들 이외에 다른 교수들에게 찾아가서 가볍게라도 내가 뭘 하는지 알려야 한다는 점이지 않을까. 보통 다들 그러면서 논문 진행 아이디어를 얻는 모양이니까, 나도 나중에 직장 잡아서 살아남으려면 미리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간에, 다음 주 언젠가 있을 C 및 M과의 미팅을 위해 향후 1주일간은 다른 거 다 제쳐두고 그 쪽 논문만 줄창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나면 예전처럼 다시 달리기 위한 워밍업은 충분히 되어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