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글을 하나 봤는데, 국내 박사를 더욱 대우함으로써 국내 학문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해결방식에서 내 생각과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전반적인 문제의식에 적극 공감한다. 나 역시 우리나라 젊은 학자들이 굳이 유학을 나오지 않아도 최신의 연구동향을 충분히 접할 수 있고, 충분한 지도를 받아 그들의 가능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강하게 희망한다.
그간 몇 차례 얘기 했지만, 미국의 연구 문화/환경을 접하고 가장 처음 놀랐던 것들은 데이터의 가용성, 관련 연구 분야의 규모 (연구자 수, 연구 주제의 포괄성 등), 그리고 취직 기회의 다양성 등이었다. 한국에서 석사 학위기간 포함 5년 가량 연구 관련 직종에 있다가 나왔는데, 그간 내가 배우지 못했던 것들이 신세계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놀란 것은, 생각해보면 내가 석사한 곳에서 박사를 했던 선배들은 내가 신세계라고 느꼈던 것들을 한국에서 박사를 하면서도 이미 알아서 깨우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석박사 기간 동안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문제는 그 여러가지 요인들이 대부분 외부 요인들이라는 거다. 즉, 자기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가장 기본이고,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지도교수의 역량, 연구 환경, 인프라 등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다른 것들은 말을 꺼내기조차 너무 조심스럽고, 연구의 인프라,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 보고 싶다.
분야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적어도 내가 하는 분야는 미국이 최첨단 연구를 이끌고 있다. 당연히 대부분의 유명한 논문들은 영어로 되어 있고, 논문 뿐 아니라 교과서/강의노트 등의 교육자료, 데이터도 영어다. 요즘 10대/20대들은 우리때 보다 영어 수준이 훨씬 뛰어나다고 들었지만, 첫째로 애초에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것은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읽는 건 사전찾아가며 하면 되지만, 효율에서 한글로 된 문서를 읽는 것과 비교가 안 된다. 말하기나 쓰기로 가면 아예 다른 차원이다.
미국이 학문을 선도하는 것의 다른 문제점은, 최신 연구 동향이 한국까지 흘러들어가는 데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실 요즘은 연구자들이 자기 홈페이지에 자신의 최신 논문을 자기 홍보겸 해서 많이들 올려두는 추세고, NBER working paper 같은 것도 시스템이 잘 구축된 데다가 대부분의 대학에서 구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최신 연구를 접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논문은 말할 것도 없고 working paper만 해도 처음 연구에 들어간 시점부터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올라오기까지 작게는 몇 개월부터 크게는 몇 년까지의 시차가 존재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인적 네트워크에서 나오는 것 같다. 교수들이 개인적 친분이 있는 다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얻는 정보. 최신 연구를 수행하는 교수들이 내가 있는 곳에 방문하여 자기 연구를 발표하며 말해주는 것을 통해 얻는 정보.
이런 점에서 미국으로 박사를 하러 오는 것은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금전적인 비용은 대부분의 박사과정이 학비 및 생활비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박사를 하는 것과 비교해 의외로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유학에는 다른 여러가지 일반적으로 잘 조명되지 않는 난관들이 있다. 예를 들면 외로움.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된다. 특히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시골에 있는 한인들 적은 곳으로 나올 경우, 본인이 굉장히 외향적이고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많이 힘들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예로는 기득권의 측면이다. 한국에서 학석박을 모두 할 경우 대부분의 경우 학사-석사-박사로 가면서 소위 말하는 학벌이 높아진다. 그러다 미국에 나오게 되면 극소수의 인재들을 제외하면 20위권 학교를 간다는 게 한국에서 서울대 가기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쉽게 말하면 학벌이 낮아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난 개인적으로 그런거 전혀 신경 안쓰지만 사람에 따라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영어도 위에서 쓴 내용 말고도 정말 여러가지 면에서 괴롭힌다. 어느 정도 지나면 생활영어나 학술영어는 그래도 크게 사고는 안 칠만큼 늘지만 평소 쓰지 않는 분야의 말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관공서에 가서 일을 볼 때라든지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내 사정을 설명하는게 보통 고역이 아니다. 친구들과 바에 가서 얘기를 할 때에도 나 빼고 모두 미국인인데, 자기들 학창시절 얘기를 꺼내면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이외에도 유학을 나온다고 딱히 해외취업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혹여 퀄에 떨어지거나 장학금이 끊겨서 한국에 돌아가게 되는 경우의 매몰비용 문제. 한인마트가 없는 지역일 경우 음식 문제, 미국도 연구 환경이 사실 평균적으론 좋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천차만별인데 이게 직접 나오기 전까진 일정부분 복불복이며 나와서 문제가 터지면 한국에서 문제 생기는 것과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큰 사건이라는 점 등등 여러가지 사항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쉽사리 유학을 결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물론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한국에 학문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토양이 갖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설령 유학의 비용이 편익보다 현저히 낮다 하더라도 국내 연구 환경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어보인다.
내가 어줍잖은 지식으로 계량이나 equilibrium model 등의 방법론을 포스팅한 것도,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하는 연구에 대해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글을 올리려는 것도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아직 내 수준에서 쓸 수 있는 글이 고급 수준의 연구를 수행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분들이 내 글의 틀린 점들을 지적해주시길 기대하고 있다. 다만, 내가 석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랬듯이, 이제 갓 학문의 길에 들어선 분들에겐 한글로 쓰여진 글을 통해 내가 배운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물론 공부라는 게 지금 익힌 걸 몇 달 뒤에만 봐도 너무 새롭기 때문에, 지금 이해한 걸 적어두는 게 나 스스로를 위한 면도 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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