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lden Times

오늘의 주제는 "불쌍한 대학원생"





티스토리는 블로그 방문자가 어떤 경로로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검색을 통해 들어온 방문자들은 어떤 검색어를 이용했는지도 알려주는데, 내 신분이 그렇다보니 이 블로그에 논문이나 연구관련 글들을 많이 올리는지라, 그쪽 내용을 검색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검색어들 중에는 가끔씩 내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것들이 보이는데, 예를 들면 


"학위 논문 주제 잡기"


"논문 쓰다 막혔을 떄"


..


대학원에서 하는 연구라는 것은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일반적인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연구는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발견을 해 내는 과정인데, "새로운" 발견이라는 것이 마구잡이로 아무거나 하다가 얻어걸린다기보다는 뭔가 하나에 꽂혀서 파고 파고 또 파야 겨우 나오는 것인지라 애초에 "제대로 된 것"에 꽂히는 것이 중요하다. Research question을 잘 잡아야된다는 건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질문하는 것에 굉장히 익숙하지가 않다. 더더군다나, 인류에 크게 기여할 발견들은 대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것들일 때가 많은데, 이런 경우 자연스럽게 연구 결과가 선배 연구자들이 한 것을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인지라 권위적인 사회분위기상 애초에 그런 주제는 생각도 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논문의 주제를 잡는 건 특히나 박사 2-3년차 학생들에게 참 힘든 일이다. 한 분야를 오래 파다 보면 대충 분위기가 보이고, 내가 뭘 하면 될지가 어느정도 보인다고 하지만, 저 시기에는 딱 연구를 시작하는 시점이라 막막하다. 오히려 더 경험이 없을 때에는 겁 없이 이것저것 시작해보겠다고 할 수 있지만, 저 시기엔 어떤 게 말이 안되는지가 아주 막연하게나마 보여서 더 시작이 힘들다. 

본인의 연구 주제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색을 하게 되는 저 마음이 너무나 절절히 이해가 되어 가슴이 아팠다. 


괜히 이런 글을 따로 쓰는 바람에 저 검색어들로 새로 유입될 일부 사람들을 위하여 내 경험을 통한 조언을 하나 하자면, 

나는 4학기째부터 C와 함께하던 프로젝트가 있었고, 그것과 연관해서 내 주제를 발굴하려고 했던 상황이었다. 아예 맨땅에 헤딩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좀 유리했던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막막했던 건 마찬가지. 관련 분야 논문 읽어보면서 재미있을 것 같은 주 1-2주에 한 번씩 C와 M에게 들고 갔다. 내가 생각한 주제들 중 약 90% 정도는 못써먹을 것들이었고, 나머지 10%는 약 2주쯤 후에 못써먹을 것으로 밝혀지는 것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반년 이상 반복했다. 계속 까이게 되면서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고 멘탈도 많이 흔들렸다. 반년이 지나도록 내가 들고가는 주제의 질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리기 시작했는데, 반 년간 저렇게 삽질을 하는 와중에도 C와 하던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을 시켰다. 우리가 쓰는 방법론이 다른 논문에서 쓰였던 적이 있는 건데, 그 방법론에서 사람들이 많이 주목하지 않았던 파트가 C와 하던 프로젝트와는 다른 분야에 적용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다른 분야"는 내가 학부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분야.

이렇게 일이 풀려가나 싶었지만 그 후로도 서너달은 더 삽질을 했다. 그러다 M과의 미팅 도중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이 의외로 괜찮은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결국 결론은, 내 경우엔 (i) 끝없는 삽질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와 끈기; (ii) 운빨; (iii) 1년에 가까운 삽질에도 나를 못써먹을 놈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끌고 와 준 지도교수 의 3박자가 잘 어우러져서 주제 선정 단계를 탈피할 수 있었다. 

물론 저런 지도교수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내 엄청난 복인데,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동료 대학원생들이나 학회 등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 계속 얘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모쪼록 나를 포함한 수많은 불쌍한 대학원생들이 수많은 역경을 잘 견뎌내고 세상에 marginal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연구자로 거듭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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